지은농산
예천군소개
  • 예천의유래
  • 위치와환경
  • 예천관광
HOME < 예천군소개 < 예천의 유래
우리 군은 소백준령(小白峻嶺)의 높은 줄기가 감싸고 낙동강(洛東江), 내성천(乃城川)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으로 은근과 끈기가 스며있는 『충효의 고장』이다.

경상북도 최북단에 위치하여 동쪽은 안동시, 서쪽은 문경시, 남쪽은 상주시와 의성군, 북쪽은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접하고 있으며, 행정구역(行政區域)은 1읍(邑),11면(面),265리(里), 면적은 660㎢, 인구는 6만 명이다.

부족국가시대(部族國家時代)에는 호로국(戶路國) 혹은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이라 군지(郡誌)에 전해지나 확인할 수 없으며,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신라(新羅)의 수주현(水酒縣), 757년(경덕왕 16)에 예천군(醴泉郡)으로 처음 불리어지고, 안인현(安仁縣, 現 山北面), 가유현(嘉猷縣, 現 山陽面), 은산현(殷山縣, 現 上,下里面), 영안현(永安縣, 現 豊山邑)을 편입하였다. 고려(高麗)시대에는 936년(태조 18) 보주(甫州), 983년(성종 2) 양양(襄陽), 995년(성종 14)년엔 청하(淸河)라는 별호도 가졌으며, 1018년(현종 9) 5도 양계로 행정구역 개편시 보주는 안동영지사부에 용궁군(龍宮郡)은 상주목에 속하였다. 1274년(원종 15) 상주의 다인현(多仁縣)이 예천군에 편입되었다. 조선(朝鮮)시대 1413년(태종 13) 보천군(甫川郡), 용궁현(龍宮縣)으로 부르다가 1416년(태종 16)에 보천군이 다시 예천군(醴泉郡)이 되었다.

1895년 용궁현(龍宮縣)이 용궁군(龍宮郡)으로 승격되고, 1896년 예천군과 용궁군이 경상북도에 속했다. 1906년 동로,화장면이 문경군에, 옛 다인현인 현내(縣內),현동(縣東),현남(縣南),현서면(縣西面)이 비안군(比安郡)에 편입되었으며, 안동군에서 감천면이 우리 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용궁군이 예천군에 통합되고 현서면이 예천군에 편입되어 풍양면 일부가 되었다. 1923년 풍기군(豊基郡)에서 상리,하리면이 우리 군에 편입되었다. 1937년 7월 1일 예천면(醴泉面)이 읍(邑)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 1,200여 년의 긴 역사(歷史)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유구(悠久)한 역사에 걸맞게 고인돌, 선돌 등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유물과 국가지정문화재 26점, 도(道)지정문화재 54점 등 소중한 많은 문화유산이 아름다운 자연자원과 어울려 있다.

또한 해마다 10월 중에 개최되는 예천군민제전(醴泉郡民祭典)은 민속놀이, 백일장, 문화강좌, 국궁대회를 비롯한 문화제행사(文化祭行事), 예천군민의 날(10. 16)행사, 군민체육대회 등이 열린다. 통명농요, 공처농요, 청단(靑丹)놀음, 재애밟기, 도해따기, 마당굿, 별신굿 등 다양한 민속예술(民俗藝術)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천(醴泉)이라는 유래는 단술「예(醴)」자(字), 샘「천(泉)」字로 삼국시대 수주(水酒)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물맛이 좋고 단술과 같다 하여 「예천(醴泉)」이 되었으며, 우리 고을의 지명 유래와 밀접한 『주천(酒泉)』이라는 샘이 예천읍 노하리에 있다.
예천군청의 소재지로서 1914년 이전까지는 읍내사부(邑內四部)라 하여 동,서,남,북의 4개 읍내면(邑內面)으로 나누었는데, 군청이 북쪽이 되므로 북읍내면(北邑內面)이라 하여 노상(路上), 노하(路下), 백전(栢田), 용산(龍山), 효동(曉洞), 나평(羅坪), 생천(生川), 정산(鼎山), 구산(九山)의 9개 동을 관할하다가,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동읍내면의 갈두(葛頭), 응동(鷹洞), 광천(廣川), 우계(愚溪), 본동(本洞), 원동(院洞), 통명(通明)의 7개 동 전역과 남읍내면(南邑內面)의 본동(本洞), 청복(淸福), 왕상(旺相), 신기(新基)의 4개 동과 서읍내면(西邑內面)의 대무(大母), 흘증(屹增), 홍심(洪心), 지내(池內), 석정(石井)의 5개 동과 승도면(繩刀面)의 본동, 고평동 일부, 개포면의 상리 일부와 신당면(神堂面)의 하리(下里) 일부를 병합하여 예천면(醴泉面)이라 해서 노상, 노하, 백전, 용산, 생천, 갈구, 우계, 동본, 통명, 남본, 청복, 왕신, 서본,대심, 지내, 석정의 16개 동으로 개편 관할하였다. 1937년 7월 1일에 예천읍(醴泉邑)으로 승격되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제6542호)에 의하여 개포면의 상동을, 1983년 보문면 고평동을 편입시켜 18개 동이 되었으며, 1988년 5월 11일 동(洞)이 리(里)로 개칭되었다. 동쪽은 보문면, 남쪽은 호명면과 개포면, 서쪽은 유천면과 용문면, 북쪽은 용문면과 감천면에 경계를 두고 있다.

관광자원으로는 주천, 예천향교, 동본리삼층석탑,석조여래입상, 개심사지오층석탑, 정충사, 흑응산성, 남산, 통명농요, 양궁경기장이 있고, 특산물은 옹골진미, 풋고추, 쪽파, 단무지, 동충화초, 누에가루, 영지버섯, 참우, 국궁(各弓) 등이 있다.
ㆍ 위 치 : 예천읍 노하리 68

옛날 우리 고을 담 밖 관혁동(貫革洞 - 지금의 예천읍 노상리)에 주천(酒泉)이란 샘이 있었다.

이 샘은 물맛이 달 뿐 아니라,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철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고 한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울산지방의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우리 고을을 지나던 양호(楊鎬)라고 하는 명(明) 나라 장수가 이 샘의 물을 마셔 보고 감탄한 나머지 “과연 예천(醴泉 - 中國에도 있는 지명으로 단술처럼 맛이 좋은 샘이 있다고 함)의 이름처럼 물맛이 좋다”고 하면서 “예천의 지명은 이 샘 때문에 얻게 되었구나“라 극찬하였다. 또 이 샘 때문에 통일신라 때 「예천(醴泉)」이라는 행정이름이 생겼다는 설(說)과 그렇지 않다는 설(說)이 엇갈리고 있으나, 참고 문헌이나 구전(口傳)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 샘(속칭 군방골) 설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군방골샘은 깊이가 8m나 되며 지하에서 용출(湧出)하는 자연수로 이름만큼이나 달고 차서 지역민들에게 원동력을 제공하는 감로수(甘露水)였고, 또한 한(恨)과 애환(哀歎)을 함께 한 현장이었다. 군방골이란 조선 중기까지 관아(官衙)와 활을 만들던 궁방(弓房)이 모여 있었으며, 일설에는 동헌(東軒)을 지키던 군방(軍房)이 있던 곳이라 하여 군방골샘 또는 궁방골샘이라 구전(口傳)되고 있다.

근년에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상수도(上水道)가 보급됨에 따라 폐정(廢井)하였던 것을 이 우물에 대한 주민들의 애정(愛情)과 우리 고을의 지명 유래와 얽힌 유서(由緖) 깊은 샘이기에 1990년에 목조와가(木造瓦家) 사각(四角)지붕의 보호각을 세우고 샘(酒泉)을 복원(復元)하여 보존 관리하고 있다.